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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8-03 14:02
<전북 출신 의병장> 해산 전수용

  1910년 경술년 8월 29일 공표된 한일강제병탄조약은 우리 민족 반만년 역사의 단절이며 국가와 민족의 치욕스런 날이다.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넘겨준다’는 조약 제1조는 대한제국까지 519년을 이어온 조선왕조에 대한 공식적인 사망선고이자 해방까지 36년간 혹독한 일제 식민통치 자행의 서막이었다.

  이로서 1895년 명성황후 시해로 들불처럼 번진 을미·을사·정미의병들의 목숨 건 의병항쟁도 보람 없이 이 땅의 주권은 일제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의병항쟁으로 시작된 애국지사들의 독립투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광복군 창설 등의 모태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광복절을 전후한 이달의 인물 7월 ~ 9월편은 조국독립을 위해 분투했던 전북출신 의병장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린 시절 시가와 문장에 영특함 보여

 

 

  해산 전수용(全垂鏞, 1879. 10. 18(음)~1910. 7. 18(음)) 선생은 187 9년 전라북도 임실군 남면 국화촌 호전동에서 부친 전병국과 모친 경주 김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휘(諱)는 기홍(基泓), 자(字)는 수용(垂鏞), 호(號)는 해산(海山)이다. 선생의 가문은 양반이었으나 조선시대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진안에 내려와 정착하였고 그 이후 수대에 걸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향반으로 남아 빈한한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선생은 불의를 보면 의기가 북받쳐 분개하는 마음이 남달리 강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경(家耕)에 종사하는 한편, 당천 이한용(李漢龍) 문하에서 학문을 틈틈이 연마해 사장류(시가와 문장) 학문에 영특함을 보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한용은 영남의 거유(巨儒) 곽종석의 문인으로 그 부근 고을에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그가 인근의 양반 자제들을 모아 교육을 시키자 선생도 그 문하에 출입하여 학문을 닦고 원근의 유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유학의 경전 중에서도 특히 심취했던 것은 의리와 명분을 양대 지주로 하는 춘추좌씨전이었으며 월남 망국사(越南亡國史)와 같은 외국 역사와 관련된 사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선생은 성장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 호남 각지를 두루 여행하였는데 이때 호남의 명유지사들인 기우만, 기삼연, 김영엽, 오성술, 고광순, 오준선 등과 교유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날로 기울어가던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구국의 방책을 모색하는 등 학문과 시국에 대한 안목을 넓히었다.


면암 최익현의 의병항쟁에 영향 받아

  1903년 한창 열혈의 기질이 발하던 청년시절에 절의로 이름 높던 선비들인 송병선, 기우만과 면암 최익현 등이 인근 마을인 익산군의 낙영당(樂英堂)에서 회동, 강회를 베풀 때 동향인 이석용과 함께 참가하여 선비들의 우국충정에 어린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은 이러한 견문과 학식을 바탕으로 하여 사장류의 박학한 지식과 춘추대의 정신에 입각한 실천 유학자로서 성숙하였다.

  이 당시 최익현은 일제가 무력과 강압에 의해 매수한 대신을 앞세워 이른바 을사조약을 늑결하는 것을 보자 곧 창의토전소를 올려 거의할 뜻을 밝히고 호남 유림지사와 문하생들을 규합하여 1906년 6월 태인 무성서원에서 창의하였다. 이때 선생은 이석용과 함께 태인에 가서 최익현을 만났으나 최익현의 의진이 전력과 전술면에서 일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빈약함을 알고 실망을 느껴 귀향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의 거두 최익현은 정읍, 순창, 남원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군에 붙잡히어 대마도에서 순국(1907. 1)하였다. 그러나 위정척사의 거두로서 그 때까지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백성으로부터 추앙 받던 최익현의 창의는 선생으로 하여금 의병항쟁에 투신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창의동맹단의 참모로 본격적인 의병대열에 참가하다

 

“사람이란 어차피 한 번 죽고 마는 것이니 왜놈과 가까이해서 죽게 될 진데 어찌 의병에 충실하다 죽어서 끝내 좋은 이름을 차지하는 것만 하겠느냐.”

『전해산 진중일기』(1908) 중에서

 

  1907년 9월 기삼연, 김용구 등이 전남 장성의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하자 선생은 이 회맹소의 종사라는 직책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 회맹소는 1908년 2월 공음전투에서 김용구 의병부대가 패전한 이후 사실상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이즈음 전북 임실 등지에서 이석용이 창의동맹단을 조직하자 선생은 동단에 합류, 참모로 활동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의병항쟁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창의동맹단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 장수, 무주, 남원, 순창, 구례, 곡성 등 호남 동부지역 9개 군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도처에서 경찰서, 헌병분파소, 수비대 등의 건물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군 토벌대와도 여러 차례 격전을 벌이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3월 남원 사촌에서 일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이어 4월 진안과 임실의 경계인 대웅 전투에서의 연패로 의진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이에 선생은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기삼연 의병장이 전사한 뒤 장성부근에서 활동 중이던 김태원과 합류하기로 하고 이석용과 결별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장성에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태원이 광주 어등산에서 일본군의 흉탄에 맞아 순국(1908. 4. 25)한 후였다.

  김태원 의병장마저 순국하게 되자 김태원 의진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이 의진의 일부를 거두어 진세를 확장하고 있었고 오성술이 흩어진 의병을 규합,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선생이 오성술의 의진에 참여하여 광주, 나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일시적으로 의진을 정비하고 있을 때 8척의 헌헌장부인 정원집이 광무황제의 조칙을 휴대하고 수십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선생을 찾아왔다. 정원집은 시위대 참위 출신으로 일찍이 을사늑결을 규탄하다가 국사범으로 몰려 전남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를 탈출했던 것이다.
 

의병대장으로 일군경과 70여 차례 교전하다

  선생은 정원집이 이끄는 해산 군인들이 합세, 의병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의병대장에 취임하여 1908년 7월 25일(음)에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면서 “왜노(倭奴)는 우리나라 신민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임진란의 화 또한 그러하거니와 을미 시국모(弑國母)는 물론이고 우리 종사(宗社)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모두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날에 죽음을 청할 것이오. 만일 하늘이 이 나라를 돕고 조종을 돌보아 이 적을 소탕한다면 그 날 우리들은 마땅히 중흥제일공신(中興第一功臣)이 될 것이다. 일체 폭략(暴掠)을 하지 말고 힘써 나라회복을 위해 싸우다가 죽자.” 라 맹서하여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공표하고 의병항전의 당위성을 밝힌 후 적을 치는 길에 오르게 되었다.

 

  대동창의단은 1908년 8월 의병항전을 개시한 이래 다음해 5월 의진이 해체될 때까지 10여 개월 동안 일제 군경과 70여 차례의 교전을 벌였다. 동단의 활동 지역은 호남 서남부의 곡창지대인 함평, 나주, 영광, 장성, 광주 등지였고 그 밖에도 장흥, 순창, 무안, 고창, 화순, 담양 등지에 이르기까지 활동영역으로 삼았다. 선생의 의진은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것 외에도 부근에서 활약하던 심남일, 조경환, 김영엽, 김원국, 박경욱 등의 의병부대와 자주 연합작전을 펼쳤다. 선생은 신속한 부대이동과 작전의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부장급의 간부들로 하여금 각기 40~100여명의 의병을 통솔케 하였으며 자신은 평소 100~150여명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작전을 수행하였다. 총 500여명에 달하던 대동창의단의 의병은 평소 소부대 단위로 나누어 통상적인 활동을 하다가 필요 시에는 합동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선생은 의병들이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식별되면 의병들의 집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일군의 보복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훈련되지 않은 의병으로 일군과 정면 대결할 수 없다는 점 등 때문에 소규모의 병력으로 야간에 이동하며 투쟁하는 게릴라식 전법을 사용하였다. 변복한 종사나 군사들을 일군의 헌병분견소, 경찰서, 수비대의 배치지역에 은밀히 파견하여 일군의 이동상황을 미리 탐지하거나 마을 주민의 신고, 면장이나 동장을 통해서 얻은 적의 이동상황을 종합하여 은밀한 곳에 매복하여 적을 기습하였다. 또한 밀정들에 의해 의병진의 소재가 파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병들이 유지하는 곳에서는 마을 어귀에 파수를 세우고 종사원들에게 줄을 세워 계속 말을 전달하게 하는 연환식(連還式) 전달제도를 운영하였다.

  의병의 기본화기는 화승총(火繩銃)이었다. 이 총은 화승에 불을 붙이고 다른 한 손으로 철환과 화약을 비벼 넣어 사격해야 하며 비가 올 때는 쏠 수 없었고 더욱이 유효사거리는 20보(약 12미터)에 불과하였다. 신식무기를 휴대한 일군과 대적하기 위해 의병진에서는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화승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한 천보총(千步銃)을 개발했다. 더욱이 이 천보총을 일부 진에서는 자체 생산하거나 수리할 수 있었고 총탄 또한 구식 납철환을 개량하여 보룡철환(寶龍鐵丸)이라는 철탄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였다. 화승총, 개량 화승총인 천보총, 개량탄환, 화약 이외에도 일군에서 노획한 신식총을 휴대하고 있었는데 그 수효는 극히 적었다.

  선생은 훈련되지 않은 의병, 빈약한 무기와 군수에도 불구하고 장성, 영광, 나주, 부안, 함평 등 당시 호남 24개군 가운데 중서부 지방을 완전 장악했으며, 일제가 무역이라는 미명 아래 미곡수탈을 자행하여 지역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광 서해를 거쳐 부안에까지 진입하여 서해를 경략, 장차 이들을 없애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선생은 정규군으로 무장한 일군에 대해 유격전술을 벌였는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의진을 주로 영광 불갑산과 함평 석문내산 일대에 주둔시켜 작전을 전개하였다. 불갑산은 서남부의 고지대이며 석문내산은 장성, 광주, 함평, 나주 등지의 평야로 둘러싸여 있는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곳이다. 이 두 지역을 근거지로 함으로써 선생의 의진은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군수품을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다.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다
 

  대동창의단의 활동이 활발해질 무렵인 1908년 겨울에 선생은 심남일, 김영엽, 오성술 등의 의병장과 함께 수차에 걸쳐 호남의병 연합체 결성을 상의한 끝에 호남동의단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여러 의병장들의 추대를 받아 동단의 의병대장에 선입되었다. 이 호남동의단의 의병장들이 활동했던 지역은 전라남북도 전역을 망라하고 있었으며 선생은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활동하였다.

  선생은 호남지역에서 의진을 규합하여 일군과 투쟁을 벌이는 한편 가렴주구를 일삼던 지방관, 일본의 위세를 믿고 횡포하던 친일관리, 일진회원, 친일부호, 헌병보조원, 경찰 등의 횡포를 징계했다. 세금 징수원을 위협하여 친일 내각의 납세를 거부하게 하는 대신에 면장이나 동장을 시켜 마을마다 군수전(軍需錢)을 배정하되 도세로서 공평하게 가산에 따라 분배, 징수했고 해산 군인을 빙자한 무뢰배, 가짜 의병을 칭하고 살인, 약탈, 강간, 방화를 자행하던 자들을 처단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민생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은 수 차례에 걸쳐 헌병보조원, 순경, 일진회원, 세금징수원, 친일부호, 가짜 의병들을 상대로 경계하는 격문을 보냈으며 이들을 토왜(土倭)로 규정하고 회유하기도 위협도 하여 그 직을 그만 두도록 하거나 가산을 몰수하고 체포해서 다스리기도 했으며 심한 자들은 총살로서 징계하였다.

  한편 1908년 일제는 일본군, 헌병보조원, 경찰 등을 포함하여 11,000여 명의 병력으로 의병을 토벌하더니 1909년에는 일본 본토에서 임시 파견된 약 2개 여단의 병력을 더 투입하고 4~5월 사이에 한국 주둔 헌병대의 천안 및 영산포 분견대의 관할 하에 45개소의 임시파견소를 증설하는 한편 43,000여 명의 한인 무뢰배들을 헌병보조원이라 해서 분산 배치시키고 의병토벌과 정보수집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의병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동년 3월 영광 오동과 덕흥 전투에서 일군 수비대와 헌병대에 연패를 당한 뒤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탈출하였으나 의병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어 거의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5월에 들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주변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의병의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최후의 방편으로 부대이동을 결심하고 새로운 항전기지를 독립운동가들이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만주로 정하고 부하들에게 북상하자고 권고하였으나 가족의 생계문제 등 많은 난관이 있어 동의하는 자가 없었다. 더구나 순종황제의 의병 해산령이 당도하자 선생은 사세가 다했음을 판단하고 마침내 의병을 해산하기로 결심하여 동년 5월 영광 오동촌에서 부대의 지휘권을 호군장 박영근에게 넘겨주고 선생은 후사를 도모하고자 했다.

 

일제에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

  일제는 선생의 행방을 몰라 백방으로 탐문하는 한편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이때 선생의 의진에 출입하던 조두환이란 자가 영산포 헌병대 통역 김현규에게 밀고하여 선생은 남원 고래산(古萊山)에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수개월 만에 일군 수십 명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일군들에게 “오늘이 있을 것을 이미 각오하였다. 죽는 것은 거의(擧義)하던 날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노부모와 약한 처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만나보고 떠나는 인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부모를 만나 인사를 올리고 부인에게 “지금 내가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니 부모님을 잘 봉양하기 바란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영산포 일군 헌병 분견대에 구금되었다.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후 대구 감옥소에 이감되어 대구공소원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선생은 박영근, 심남일, 오성술, 강무경 등과 함께 7월 18일(음)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선생이 순국하자 그 시신을 선생의 4촌형이 운구해 와서 장례를 치렀는데 상여가 고택 앞으로 흐르는 시내를 건너자 선생의 부인 김해(金海) 김씨는 집으로 돌아와서 극약을 마시고 자결함에 상여가 다시 돌아와서 쌍상여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_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부산일보

 

  전해산은 전남 지방에서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격문을 써서 여러 곳으로 보냈다. 비단 왜적에 한하지 않고 인륜을 어긴 친일 분자와 가짜 의병의 무리, 일진회원, 순경, 세금 징수원 등에게 경계하는 격문을 보낸 것이다.


1. 영산포 헌병 분대장 대원수사랑(大原壽四郞)에게 보냄
 

오호라! 사람이 하늘과 땅에 참여하여 삼재(三才)가 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윤기(倫紀)가 없으면 분별이 없고 분별이 없으면 금수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원인(原人)에서 중국의 바깥지역을 말하면서 오랑캐라 금수라 하였으니 그로 보면 한국이나 일본이 모두 오랑캐요 금수다. 그러나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 쪽의 사람이 되어 예악과 문물의 거룩함이 자못 중국의 기품이 있으므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소중화라 일컬어 왔던 것이다.

태평한 세월이 유구함에 반하여 난신 적자가 나와 다투어 귀국을 따라 어진 임금의 대가 섰다고 잘못 알고 있으며 이등후(伊藤候)가 왕을 죽이고 바꾼 것은 마침내 나라를 팔고 인군을 바꾸는 변이 있었으니 이것은 보는 바와 익히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며 어찌 우리나라 사람의 본성이 이와 같겠는가? 무릇 오랑캐다 금수다 하고 지목 받는 그들도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면서 윤기도 없고 분별도 없기 때문에 귀하를 오랑캐와 금수라고 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귀국과 교제한 지 몇 해가 못 되어 소중화가 갑자기 작은 오랑캐가 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큰 오랑캐가 아니냐?

아! 슬프다. 천지가 생긴 이래로 치세와 난세가 잇달아서 치세에는 윤기도 있고 분별도 있거니와 난세에는 윤기도 분별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윤기도 없고 분별도 없으니 난세가 분명하다 난세가 되면 마음도 분리되고 도덕도 분리되므로 황제는 천하를 잃게 되고 왕은 나라를 잃게 되고 제후는 그 벼슬을 잃게 되고 백성은 그 집을 잃게 된다. 이것으로 귀국이 우리나라보다 먼저 망한다는 것은 뻔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걸·주 같은 악으로도 천하를 잃었고 항우 같은 힘으로도 천하를 얻지 못한 것은 모두가 마음이 분리되고 덕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보조원은 귀하의 월급으로 먹고사는 자로서 진정 윤기도 없고 분별도 없는데 무릇 귀하의 월급으로 한갓 먹고만 사는 자는 또한 윤기도 없고 분별도 없다면 귀하도 윤기돟 없고 분별도 없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함평의 보조원과 나산(羅山)의 수비대는 모평(牟坪), 성산(城山) 등지에 출몰하여 모두가 부녀자를 겁탈하므로 어린아이나 남녀들이 집을 잃고 길가에 방황하여 그 원한이 하늘에 사무치는 현실이다.

천도(天道)는 지극히 공평하여 사가 없는데 귀하만이 어찌 홀로 용서 받을 수 있겠는가? 옛날부터 전쟁을 난리라 칭하였는데 이것을 우리 폭도들 때문이라 하여 보조병을 시켜 드나들며 노략질하며 구타하고 겁탈하고 살해하니 만약 우리의 바탕이 본래부터 포악하다고 인정되면 인으로 제지하고 의로써 본을 보인 뒤에야 혹 포악함을 버리고 덕으로 나아갈 이치이거늘 도리어 악으로 훈련시키고 간음으로 날뛰니 어찌 바라는 바가 있겠는가.

귀국이 비록 우리 대한을 삼켰을지라도 귀하가 말하는 우리 폭도를 제거하지 못하면 마침내 반드시 토해내고 말 것이니 원컨대 귀하는 공정한 마음으로써 의리로 저울질하여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보조원을 잘 훈련시켜 그 보조원이 우리에게 돌아오게 해야 환을 면할 것이며, 그래야만 명철한 보신책이 될 것이다. 내 말을 심각하게 듣고 반드시 채택하라. 아아 슬프다. 오늘에 한·일이 서로 싸우는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냐, 사람의 잘못이냐? 말로는 다함이 없으나 글로서는 다함이 있다.

위의 격문은 1908년 10월에 당시 영산포 일본 헌병분대장에게 보낸 글로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이용하여 인륜의 화복을 통해서 천도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당시에 인륜의 화복을 통해서 천도를 실천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당시에 인륜이 상실되고 분별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현실을 지적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 헌병대에서 임시로 고용해서 쓰고 있는 헌병보조원들의 만행을 지적하여 이들을 잘 훈련시켜 의병진으로 복귀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 헌병보조원들은 일본 헌병이나 수비대의 의병 토벌에 직접 동원되기도 하고 지역 주민들을 위협하여 의병들에게 협조하지 못하게 하거나 위장해서 의병진의 구성, 전력, 이동상황 등의 정보를 탐지케 해서 의병들은 일본군의 위력을 등지고 살인, 강도, 강간, 약탈 등을 자행한 일이 많았다. 위의 격문은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당시의 헌병보조원의 실상을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다음에는 전해산이 격해주군반당문(檄該州郡反黨文)을 보냈는데, 이 격문은 각 고을에 있는 헌병보조원이나 그 밖의 친일단체에 들어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으로 하루 속히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라는 내용이다.


2. 격해주군반당문(檄該州郡反黨文)

아! 슬프다. 천하의 대의가 셋이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빠지면 사람은 사람답지 않고 나라는 나라답지 않다. 무엇을 세 대의라고 하느냐 하면 조종(祖宗)의 땅은 한 치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으며 조종의 백성은 한 사람이라도 오랑캐가 될 수 없으며 조종의 도학(道學)은 하루라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 도학이 만약 떨어진다면 인군은 인군답지 않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으며 아비는 아비답지 않고 자식은 자식답지 않아서 인도(人道)가 끊어지므로 땅과 백성은 없을지라도 도학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무릇 조정이 돈을 좋아하여 사람을 얻지 못하고 난신적자가 세상에 접종하려 멀리 해외의 더러운 오랑캐를 끌어다가 우리의 정권을 빼앗고 우리의 재정권을 움켜 쥐더니 마침내는 없애고 두는 것을 제멋대로 하고서 인군과 신하와 아비와 자식의 윤리를 남음 없이 쓸어버리고 우리 동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천지에 스스로 설 수 없게 한 것은 어찌 홀로 이등박문(伊藤博文)과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때문이겠느냐? 모두 조정에서 평일에 길렀던 무리들이 조야에 널리 펴져있어 길을 이끌어 교제하고 그들의 사냥하는 매나 개가 되어서 반드시 우리의 종사를 뒤엎은 연후에 곧 바로 좋아하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냐!

도대체 홀로 무슨 마음으로 심지어는 여러 모임이 함께 일어나고 여러 부호가 마음을 합하여 의리를 원수와 같이 보고 왜놈의 귀와 눈이 되어 학도라는 이름으로 성인을 헐뜯고 현인을 매도하며 회원이란 이름으로 왜놈에 아첨하고 원수를 섬기어 적들의 무기를 가지고 우리의 백성을 쫓아내고 반드시 우리 인류를 남김없이 죽이려 하니 우리가 살면 저들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일이 여기에 이르면 부모나 조종을 잊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나는 비록 불민하나 일찍이 당대의 대인군자와 상종하여 목숨을 바쳐서라도 의리를 취해야한다는 것을 들었다. 지난번에 시골에서 칼을 집고 일어선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의 가르침을 이어 받았고, 일찍이 성시를 방황하던 녹천 고광순(鹿川 高光洵)의 절의를 사모하였던 것이다. 비록 이분들과 서로 제휴하여 저 오랑캐를 무찔러 우리 국가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성이 갑자기 떨어져 영웅이 눈물을 머금고 있지만 이 의리는 천지와 같이 유구하고 일월과 같이 밝아서 생사로서 있고 없고 하는 것도 아니요 성패로서 더하고 덜할 것도 아니다.

요즈음 군의 형세가 자못 떨치고 의로운 깃발이 날로 날리어 김죽봉(金竹峰), 김치재(金痴齋)는 산골에 드나들고 이순식(李淳植), 박도경(朴道京)은 바다 연변에서 연락하고 신화산(愼華山), 조대천(曺大川)는 서북에서 경영하고 심남일(沈南一), 안덕봉(安德峰)은 동남에서 치달리고 나는 정원집(鄭元執)과 함께 수십 여진을 규합하여 산과 바다를 횡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벌떼 같이 일어나는 장수와 독수리 같이 덮치는 군사가 별처럼 밝히고 바둑처럼 놓여 가는 곳마다 용맹을 자랑하며 맹세코 이 왜적의 무리를 없애기로 한다.

아! 불상한 너희 보조원은 이제 죄를 뉘우치고 한 놈의 적이라도 그 머리를 베고 진흙땅에 머리를 박고 살려달라고 청한다면 혹시 살아날 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잘못을 그래도 저지른다면 병력을 더하여 조건 없이 죽일 것이니 이 격문을 보고 후회함이 없도록 할지어다.


다음에 전해산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격유가(檄楡歌)란 것을 지어서 헌병보조원에게 돌렸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3. 대동의병장 전해산은 국한문의 한 격가로 여러 회도와 각도의 보조원에게 통유하노라. 이 내 몸이 표탕하야 지구열방 유람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니 장할세라 좋을씨고 금수강산 삼천리에 천부지국이 아닌가. 단군 기자 먼저 나고 나려(羅麗) 점점 문명하여 성조용흥(聖祖龍興) 장할씨고 예의 문물오백년에 삼강 오륜 밝았구나. 집마다 효자요 사람마다 충신이라 소중화(小中華) 좋은 이름 천지간에 자랑하다. 인천 우로(仁天 雨露) 휴양(休養) 중에 조종(祖宗) 덕택 부모 정혈(精血) 이 한 몸이 생겼구나. 이 한 몸이 생겼으니 어찌하여 이적(夷狄) 되리. 이적 중에 태서인(泰西人)은 진순지기 미산하여 점피덕화 할 것 같으면 사람 되기 쉽거니와 흉추 최피 왜노국은 예의 염치 전혀 없어 의이의 적은 것이 사갈의 성정이라 군산 부자 제 알소냐.

난신적자 접종하여 시부여군, 제 군신 제나라나 망할게제, 대방을 탄병하려고 우리 난적 초인하여 흉두 본받아서 오흉 칠적 천만적이 조정사방 포열하니 재상방백 수령들과 일진 순사 보조병이 구적 병기 들어 메고 형제 붕우조차 잡아 우리 인종 다 멸한다. 우리 인종 다 멸하면 저희는 살것구나. 파란 애급 요원하여 이목 불급되거니와 당당 월남 사천년이 우리 종교 숭상하여 예의지방 되었더니 불란서의 흉계로서 제반 학교 권성하고 재권 정병 다 빼앗아 저의 계책 거의 되매 이십만 명 보조병을 후료로 모집하여 장열 의병 다 잡은 후에 함의제(咸宜帝)를 잡아가고 10세 소아 찬립하여 심궁뇌수하여 놓고 보조료를 전감하고 편복랑자 역사 중에 저의 성명이 가련하다.

눈도 없고 귀도 없는 제반 회원 보조원아, 우리나라 어찌되며 우리 인군 어디갔고, 너의 성명 고사하고 너의 마음 쾌하겠다. 너의 조선 황천 중에 열성조를 뫼셨구나. 사직 종표 구허되면 무슨 안면 앙대할가. 신로 귀책 답지하여 그 자손을 생각겠다. 그 후료를 받아다가 처자 먹여 무엇하랴, 번연 희오 어렵지 않다. 제 총 들고 제 칼 가져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놈, 도간진멸 반장사라 살아서는 효자 충신 죽어서는 의귀로다. 너의 화복 너 알아서 오래 집미 말아서라. 무지 취사 민망하여 고자 문유 일번 후 병력소가 요대 없어 이급처노 할지 이 격도 여장 무회하라.

다음에는 당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걷고 다니는 이른바 세무영수원이란 자들에게 보내는 글이 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4. 게시 세무영수자류(揭示 稅務領收者流)

무릇 지세(地稅)는 세상이 생긴 이래로 국가에서도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고 백성들도 이보다 더 중요한 책임 있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 액수가 있고 바치는 것도 그 시기가 있어서 나라는 온갖 용도에 궁색함이 없고 백성은 이바지함을 거역함이 없으며, 위에서는 백성을 학대하는 정사가 없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호위하는 도리를 잃지 않았다. 이는 고금을 통하여 천하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공통하는 바로서 자기 백성이 아니면 받아들이는 법도 없고 자기 임금이 아니면 바치는 일도 없으니 바로 천지의 상도요 고금의 통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태조 고황제께서 국가를 창건하신 이래로 토지가 비옥하고 척박한데 따라 도주도 많고 적은 구분을 두어 나라에는 도안이 있고 고을에는 양안이 있고 들에는 금기가 있음으로써 관리들은 숫자를 불리는 농간이 없고 백성들은 부당한 과세를 물지 않았다. 그래서 삼천리강토와 500년 국가 종사에서 간격 없이 시정해 갔던 것이다. 혹시 흉년과 풍년에 따라 다소 변동은 있었으나 차라리 감액은 있을지언정 더 받는 일은 없었으며 국가가 함부로 징수하지 않음으로써 창고에는 남은 양곡이 있고 백성은 남은 자력이 있어 오랫동안 요순의 덕화를 누려왔다.

천도가 무상한지라 나라의 운수가 비색하여 황위를 펼치지 못하고 왜적은 악독을 부리고 적신들은 외국과 결탁하여 국가에 화를 끼치는 것이 하도 많으니 낱낱이 들어 설명할 수 없다. 더욱이 왜놈들이 우리 농토를 억지로 빼앗으려는 것은 그 속셈이 필경에 인종을 없애고 나라를 빈터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 우리 정부에는 대신 직책을 가진 자들이 왜놈에게 붙어서 나라를 좀먹고 있으니 더러운 자들이라 기대할 것조차 없거니와 소위 세무 영수하는 면장의 무리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민간인들로서 어찌 거 옛날 변장사가 한꺼번에 두 마리 호랑이를 잡듯이 못하며 어찌 저 월남의 지난 역사를 생각하지 못한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왜놈의 역군이 되어 낮이나 밤이나 풍우한서를 가리지 않고 동으로 서로 쉴 새 없이 쫓아 다니며, 그래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우리 대한 국민의 한도 있는 재물을 가져다 원수인 왜적의 주머니에 넣어주고 요순 같은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친히 구중궁궐에 계시어 신민의 봉양을 누리시지 못하고 요순의 세상에 사는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벼슬도 못하게 하고 농사도 못 짓게 하여 백성 된 직책을 못 지키게 한단 말인가.

아! 네놈들은 어찌 금수가 되려 하는가. 무릇 왜놈을 받드는 일이라면 조금도 기탄없이 달갑게 노예가 되고 왜놈의 명령이라면 엄하게 지키기를 우리 임금의 명령보다 더하여 민생의 재물을 빼앗기를 성화보다도 빨리하여 제 임금을 배반하고 왜놈에게 충성하여 제 아비를 버리고 왜놈을 공경하여 충성과 효도의 명예를 왜놈에게 얻으려는 것이 네놈들이 아니고 누구란 말이냐?

아! 이제 제 살을 베어서 굶주린 호랑이 배를 채워주면 호랑이의 요구는 한도가 없고, 제 살은 다 없어지게 될 것이니 살이 없어지고서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무릇 만물이 이제 목숨을 아끼는 것이어늘 어째서 제 목숨을 끊으려 드는가. 원컨대 이 말을 두세 번 되풀이해 보고서 빨리 그 직무에서 떠나 우리 군사의 칼날에 피를 바르게 하지 말라.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이니 이민하여 종자를 바꾸는 날에는 어디로 갈 것이냐 아! 애석한 일이다.

  위의 글은 전해산이 우리 국민으로 왜적에게 붙어서 우리 백성을 괴롭힌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였으며 그들이 회개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가를 짐작케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까지 막연하게 일본의 침략을 알고 있었는데, 이 글로서 일본이 정치적으로 주권을 빼앗은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백성의 생존권까지 빼앗으려 무거운 세금을 부과시켜 그것을 빼앗아 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것을 그들의 손으로 아니고 우리 동포를 매수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예견하면서까지 그러한 악독한 짓을 하였다는 것은 천인공노할 만행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당시 의병을 일으킨 애국심의 발로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충분히 이해시키는 내용의 글이다.

  그리고 당시 소위 세무 영수원이라는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에만 팔리어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하고 있으니 하루 속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직을 버리라고 권고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의병들의 칼날에 목숨이 끊어진다는 경고를 하였으니 그들도 사람인지라 간담이 서늘하였을 것이다. 이글은 당시의 의병장으로서 한낱 허장성세가 아니고 진실로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구구절절에 나타나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옷깃을 새롭게 여미게 하는 준열한 글이기도 하다.

 

다음은 조세 청부업자인 집강(執綱)이란 직에 있던 부호 오양중(吳良仲)의 집에 방화하고 해당 면장에게 보내는 격문이다.

  5. 영 삼가면장 및 해동동수(令 三加面長 及 該洞洞首)

오양중의 죽음과 집강가의 충화에서 그들의 죄는 이미 노출되었기에 마을에서는 반드시 요란스럽게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들이 필경에 악독을 부려 면장과 동장을 잡아가서 왜놈들에게 붙여 가난한 마을에다 수 천금을 배정해서 거두어 갔으니 아, 하늘도 무심하여 아직도 그 무리들에게 벌을 내리지 아니하고 살려두어 의병에게나 민가에게 이처럼 앙화를 끼치게 하니 애잔한 백성들이 갖은 모욕을 받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있겠느냐. 비록 그러하나 천도란 원래 올바른 것이니 어찌 끝내 이 무리들만 영구히 잘 지내게 하고 의병과 민간에게는 종시 원수 갚을 날이 없게 하겠느냐. 가을바람이 한번 불자 의병의 북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으니 머지않아서 파죽의 형세를 얻게 될 것이다.

본 면은 지대도 요지요 곡식도 풍부하니 의당 머물러 있는 의진에게 임시 군량을 수용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민간의 곡식이 많이 나오기 마련일 것이다. 유독 집강 놈의 전답은 반역자의 물건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전답에서 산출되는 농작물은 금년이 풍년이라 의당 많을 것이다. 때도 이미 8월이 다 되었으니 수확할 시기가 차츰 다가오므로 본 동민에게 역사를 잡혀서 실어 내게 할 터인데, 만약 임박해서 수확하기로 한다면 자연시기를 잃게 되고 또 백성을 괴롭힐 염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당부하는 것이니 그 전답에서 산출되는 여러 가지 곡식을 미리 수확하여 정확히 계산해 두고 지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만약 면장이나 동장이 양다리를 걸치고 번번이 보아 넘기어 시기를 잃어버리는 폐단이 있게 된다면 이는 바로 왜놈에게 충성하는 것이요 우리 임금에게는 반역이다.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 우리나라에서 죽는 것이 저들에게는 손해도 이익도 될 것이 없다. 사람이란 한번 죽으면 그 뿐인데 왜놈에게 붙어서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 의로운 일에 가담하여 죽는다면 죽어도 아름다운 이름을 잃지 않을 것이니 어찌 그것과 같겠느냐. 마땅히 일하는 것을 헤아리어 법으로 반드시 다스림을 당하는 데까지 이르지 말지어다.

 

이 격문은 친일 부호인 오양중을 죽이고 집강의 집에 불을 지른 뒤에 그 면의 면장과 그 마을의 동장에게 보낸 글인데 자신의 의진에게 군량을 수송하라는 일종의 명령서이다. 매국노의 토지에서 산출되는 곡식을 몰수하되 그 지역의 주민에게 일을 시키고 거기에 든 비용만을 제외하고는 가져 갈 것이니 정확히 계산해서 지령을 기다리라는 지시와 아울러 면장이나 동장도 왜놈에게 충성을 할 것이 아니라 대의를 위하여 일을 하도록 권유까지 한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당시의 의병의 기세와 또한 우리국민 중에 의외에도 왜놈에게 충성을 다하는 무리가 많았다는 것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그 군의 대소 백성에게 보내는 글이다.


6. 게시 해군대소민인(揭示 該郡大小民人)

현재 좀도둑들이 의병이라 자칭하고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나타나서 의거를 빙자하여 민간에게 침해하는 폐단이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부녀자를 강간하며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구타하니 궁촌 백성의 원통한 현상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날마다 본진에 달려 온다.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이냐.

대개 이런 자들은 의병이 아니라 역적이니 본소로부터 만약 엄금하지 않으면 백성이 어떻게 살겠느냐. 더구나 군법을 어디에 쓰자는 것이냐? 그러나 이들이 워낙 도둑질에 능하여 출몰이 비상하므로 아직 잡히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또 지금 왜적을 미처 무찌르지 못했는데 어느 겨를에 이 지방 도적을 없앨 수 있겠느냐. 그렇지만 이미 의병의 이름을 띠고 있는 이상 그저 버려 둘 수가 없는 일이므로 이와 같이 특별히 당부하는 것이다.

이 절도놈들에 대해서는 소관 지방에서 본소의 장령이 있고 없는 것을 탐지해서 만약 장령이 없이 사사로이 토색하는 자는 즉시 그놈들이 휴대한 무기를 압수하고 잡아 묶어서 본소로 압송하면 단연 용서 없이 죽일 것이다. 혹시 그 지방 면장이나 동장이 약속을 준수하지 않고 사정에 얽매어 차마 못해서 본소로 하여금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폐단이 있게 한다면 모든 일이 숨길수록 더욱 나타나게 마련이니 이후 사정이 탄로되는 마당에 중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격문에서는 현재 좀도둑들이 의병을 빙자하여 민간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지대하고 심지어는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을 구타하여 원성이 높으므로 이들이 나타나면 의진에 연락하거나 잡아서 보내면 군율로서 처단하겠으니 협조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위의 몇 개의 격문에서 본 바와 같이 친일 분자인 헌병 보조원, 일진회원, 경찰, 세금 징수원, 친일 부호 등을 토왜(土倭)로 규정하고 회유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여 그 직을 그만 두라고 하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그들의 집을 방화하거나 체포해서 태형으로 다스리기도 하고 심한 자는 총살로써 징계하였다.

또한 해산 군인을 자칭하는 부랑자들이 무기를 얻어서 한명 또는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주민들을 불안하게 할 뿐 아니라 의병을 가칭하고 도둑질을 일삼는 무리들과 의병이라 칭하고 무리를 모아 의병진의 정보를 헌병 보조원들에게 누설하여 일본군을 끌어 들이기도 하고 의병장을 밀고하여 체포당하게 하거나 의병장 사이를 이간시키며 의병장과 의병들 사이를 이간해서 의병진의 불화를 조성하며 약탈, 방화, 살인, 강간 등을 자행하던 가짜 의병장이나 의병의 무리 등도 의진의 토벌 대상이었다.

따라서 전해산의 의진이 세력을 유지했던 장성, 영광, 나주, 함평, 무안 등지에서는 일본군이나 경찰 수비대들이 활동하기 어려웠고 토왜의 무리들인 친일부호, 일진회원, 세금 징수원, 해산군인을 빙자한 부랑자, 가짜의병 등은 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